"사상 최초" 만이 지닐 수 있는 확신과 자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 아르투르 슈나벨, 1932~1935(Document)
- 80년에 육박하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르투르 슈나벨이 남긴 역사상 최초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녹음은 그 가치를 아직 상실하지 않았다. 물론 더 좋은 음질의 매체로, 기술적으로 더욱 완벽하고 해석 상으로 한층 세련된 녹음들은 이후 수없이 많이 등장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감상자라면, 그 모든 녹음들의 시조 격인 이 음반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을 것이다.

- 외형으로만 판단하면 슈나벨의 연주는 어쩌면 실로 졸속스럽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구조와 형식미가 박살이 날 정도로 오락가락하는 템포설정, 지금의 시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스 터치들, 그리고 원 매체 자체가 지니고 있는 한계로 인한 빈약한 음질 등은 이 음반에 손이 선뜻 가지 않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에 담겨 있는 슈나벨의 해석은 듣는 이를 잡아끄는 매력을 유지하고 있다.

- 사실 슈나벨의 연주가 현재의 기준에서 볼 때 그토록 엉성한 외관을 갖추게 된 것에는 매체의 탓이 크다. 테이프를 통한 녹음기법조차도 발명되지 않았던 그 시절, 한 면에 고작 몇 분의 내용밖에 담을 수 없는 SP의 매체 상 한계는 대가 슈나벨로 하여금 어쩔 수 없는 타협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러한 가혹하기 짝이 없는 조건 속에서도, 슈나벨은 그토록 혐오했던 매체를 위해 자신이 지니고 있던 베토벤 전문가로서의 기량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 가장 괄목할만한 점은 자유로운 템포의 설정과 확신감 넘치는 터치이다. 슈나벨은 철저히 자신의 경험과 주관에 따라 자유롭게 연주하고 있으며, 절제와 과장 모두를 뜻대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분명히 그가 이 전집을 녹음할 당시에는 비교할 대상이 될만한 다른 녹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슈나벨 본인의 요청에 따라 사전 예약된 100 셋트만 발매될 예정이었기에, 세션 자체가 음반 작업이라기보다는 콘서트를 기록한다는 분위기가 강했었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전집을 쭉 듣고 있다보면, 확신에 넘치는 슈나벨의 주관적 해석이 때때로 듣는 이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순간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깨닫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하게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발트슈타인" 과 "함머클라비어"는 특기할만 한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발트슈타인"의 2악장에서 슈나벨은 여타의 녹음과 비교해볼 때 확연히 긴 시간을 잡아먹는데, 그러한 시간과 노력의 투자는 곧이은 3악장에서의 전환에서 나타나는 인상적인 변화로 우수리를 갚고도 남을 만큼의 성과를 거둔다.

- 옛날 연주, 그것도 역사상 최초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이라는 점에서 호사가적인 취향이 있는 감상자라면 그것 만으로도 한번 쯤 들어보고 싶은 음반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단지 "사상 최초" 라는 점만이 아니라, 거기에 들어 있는 내용의 측면에서도 이 음반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원 저작권자인 EMI의 손을 벗어난 음원을, Document 사는 정말로 저렴한 가격과 리마스터링을 거쳐 다시 내놓았다. CD 1장 값에 이 정도 과실을 맛볼 수 있다면 결코 나쁜 거래는 아니다.

p.s. 슈나벨의 전집을 새로 구매할 분을 위해
슈나벨의 이 전집은 Document 사 이외에도 EMI의 원 전집, Naxos의 히스토리컬 레코딩 등 다양한 레이블에서 CD화되어 있다. 하지만 EMI의 원 전집은 가격이 너무 비싼 점이 문제다. 한편 Document의 경우, 가격 면에서는 더할 나위없이 우월한 저렴성을 자랑하지만 리마스터링의 방식과 그 오리지널성에 있어선 의심이 간다. 리마스터링 결과물은 지나칠 정도로 소음이 사라져 있는데, 때때로 듣다 보면 원 SP의 음을 지나치게 인공화시킨 부자연스러움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게 진정 Document 사가 직접 리마스터링한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회사 자체가 예전부터 다른 레이블에서 복각한 것을 무단으로 가져온다는 루머가 있는 동네고, 무엇보다도 XXCM의 옛 10장짜리 CD랑 너무 비슷하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슈나벨의 전집을 마련할 생각이 든다면, 개인적으론 Naxos의 히스토리컬 레코딩 시리즈를 사 모으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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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나벨의 해석에 관한 부분을 2010. 3. 14. 15:55 에 수정함.
by 영어덜트 | 2010/03/14 00:38 | 클래식 음반 리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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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한우 at 2010/03/14 02:40
슈나벨은 처음에 녹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죠.. 나중에 이 생각이 바뀝니다만..

Document사는 제가 생각해도 다른 회사의 녹음을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발햐의 10장자리 오르간 전집도, 제 기분상 DG에서 나온 오리지널 마스터즈를 그대로 가져온것 같거든요.. 개인적으로 확인 작업을 하고 싶지만, 시간이 나지 않네요..

EMI의 복각은 꽤나 욕 먹었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잡음 줄이다가 음까지 죽였다고.. 고클에서 본 기억이..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10/03/14 16:01
제가 이 음반에 관심을 가지게된 것은 2년 전 쯤인가 한국에 번역되어 감상자들 사이에서 작은 파란을 일으켰던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적인 죽음" 이라는 책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음반 역사상 기억될만 한 100장의 명반 중에 이 전집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죠. 말씀하신 슈나벨의 태도도 그 책에서 접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인지, Document의 싼 복각으로 들을만큼 듣고 나니 Naxos 히스토리컬의 탁월한 복각으로 다시 슈나벨 전집을 꾸리고 싶어집니다....-_-;;; 낱장으로 사모아야 하긴 해도, 돈은 Document의 것보다 3배쯤 비싸긴 해도 말이죠. 애착이 가기 시작하니 갑자기 마구 땡기네요.
Commented at 2010/04/02 17: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10/04/05 23:07
내가 가지고 있는 이 Document 레이블의 복각음반은 이제는 품절상태. 구할려면 해외구매를 하던가 해야 할텐데 환율이 요새 장난이 아니라서 염가반으로서의 이점은 없을 걸. 학교에 와서 낙소스뮤직라이브러리에서 Beethoven Schnabel로 검색해서 찾아 듣던가, 아니면 Naxos의 한장당 6~7000원하는 복각음반을 9장 사서 전집을 갖추던가 하시길...... 얼마 전에 재수입되었는지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재고가 꽤 남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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