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이름만으로 평가하지 말라: 브루크너, 교향곡 8번 - 로린 마젤, 베를린 필하모닉, 1989(EMI)
- 위의 앨범 자켓은 정확히는 EMI의 미국 지역 염가 시리즈물인 "세라핌" 의 것으로, 원래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염가 기획 시리즈 "EMI RED LINE"에서 먼저 음반화됐던 연주다. 5년 전 시점에서 온라인 구매시 장당 6천원이었던 "RED LINE" 시리즈로 이 연주를 처음 구매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4악장 종반부에서 CD가 튀는 증상이 있었다. 몇 번이나 교환을 받고, 구매처를 바꿔 새로 사보기도 했으나 문제가 계속되어, 결국 위 자켓의 미국반을 사서 해결을 보았다. 결과적으로는 CD 1장에 3만원 넘게 준 셈이다.

- 이 음반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음악 감상에 있어서 "누가" 지휘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모차르트는 역시 발터고 베토벤은 누가 뭐래도 푸르트벵글러이며 브루크너는 첼리비다케나 요훔이 아니면 안된다는, 뭐 그런 '이 한장의 명반'식의 관념 말이다. 그런데 그런 관념에 비춰볼 때 완전히 사도(邪道)에 해당되는 마젤의 브루크너가 뜻밖에 너무나 매력적이었던 거다. 질질 끌거나 괜시리 무게감을 잡는 일 없이 곡의 본질을 직설적으로 풀어내는, 명료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연주 앞에 선입견은 설 자리를 잃었다.

- 지휘자나 연주자 이름만 놓고 수준을 평가하는 악습은, 아무래도 실연을 접하는 일이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한국 음악 감상자들의 고질병이다. 물론 연주 실황을 비롯한 각종 정보들의 소통과 공유가 예전에 비해 양적이나 질적으로 훨씬 나아진 요즈음에는 개선되고 있긴 하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기존의 관념을 완고히 지키고 있다. 그런 보수파들에게 이 음반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깨달았으면 좋겠다. "누가" 가 아니라 "어떻게"가 훨씬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 녹음 년도에서 짐작해보자면, 마젤의 이 연주는 카라얀 사후 베를린 필의 차기 수장 자리를 놓고 벌어졌던 치열한 막후 경쟁의 부산물이라 생각된다. 결국 베를린 필은 아바도를 선택했지만, 이 음반에서 나타나듯이 게르만적 음악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작품의 핵심을 곧바로 찔러들어가는 마젤의 스타일이 베를린 필과 결합하게 되었다면 어떤 성과들이 나타났을지가 참으로 궁금해진다. 역사에는 "만약"은 없다지만, 이런 음반을 접하고 나면 그 "만약"에 대해 자연스레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을 수 없다.
이글루스 가든 - 클래식 음악 듣기
by 영어덜트 | 2009/12/19 14:33 | 클래식 음반 리뷰 | 트랙백 | 덧글(6)
트랙백 주소 : http://youngadult.egloos.com/tb/226950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ibrik at 2009/12/19 15:24
적극적으로 공감합니다. 말씀처럼 '이 한 장의 명반' 식의 음반 감상은 자칫하면 다양하고 풍부한 연주를 그냥 흘려버릴 수 있는 우를 범할 듯합니다.

저도 얼마 전에 우연히 Stephen Cleobury의 <메시아> 음반을 '우연히' 들을 일이 있었는데,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었습니다. 흔히 <메시아>하면 떠오르는 지휘자의 음반은 모두 갖고 있으면서 마치 <메시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착각 속에 빠졌던 제 모습을 반성하기도 했답니다.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09/12/20 14:11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음악가들이 있는데, 단지 유명하지 않다거나 나이가 젊다는 이유 등으로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들을 망각하곤 하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漁夫 at 2009/12/19 17:41
제 옛 포스팅 중 마젤의 DG Original Masters 얘기가 있는데, 젊은 시절의 마젤도 결코 만만하지 않지요. 아직까지 top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는 점은 우연이 아닙니다.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09/12/20 14:12
마젤은 좀 지나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과소평가받고 있는 지휘자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예전엔 마젤이 과대평가되었다고 보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Commented by 한우 at 2009/12/20 17:19
마젤은 국제적으로 과소평가를 받는거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영어덜트님의 포스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반지'를 1시간 관현악 곡집으로 축소 시키는등 여러 많은 레코딩을 한 실력이 넘쳐나는 지휘자인데 말이지요

요즘은 어디 음악회 감독을 맡고 계시는 것 같던데, 뭘 하시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09/12/20 19:06
마젤은 현재 발렌시아에서 Palau de les Arts Reina Sofia의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네요. 출처는 http://www.maestromaazel.com 입니다. 자그마치 공식 홈페이지에, 블로그에, 트위터까지 손대고 계신 정정한 영감님이시죠~

:         :

: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