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스 유감
- 처음 클래식 음반들을 사서 듣기 시작했던 5년 전, 메이저 레이블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음반에는 다채로운 선택지가 존재했었다. DG의 오리지널스, EMI의 "세기의 위대한 레코딩(GROC)", Philips의 "Philips 50", Decca의 "Decca Legends" 등등. 5년이 지난 지금, 남아있는 선택지는 오리지널스와 GROC 단 두 개 뿐이다. Philips와 Decca의 시리즈가 같은 유니버셜 그룹 산하의 레이블이라는 이유로 오리지널스에 사실상 흡수 통합 되었기 때문이다. 심히 유감스럽기 그지 없다.

- 사실 번스타인의 "대지의 노래" 포스팅에 달린 답글들에서 한번 얘기가 나왔듯이, 어차피 다 같은 24bit 프로세싱 리마스터링 방식이라면 원 음원의 녹음 및 보존 상태를 제외하면 각 레이블 별 디지털 리마스터링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매체를 수용하는 감상자가 단지 매체 자체의 기술적 재현 수준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고유의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Decca, DG, Philips가 다 똑같은 회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회사들은 음반 제작에 있어서 목표하는 바와 추구하는 가치가 서로 달랐고, 그로 인해 각기 별개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Decca가 "오페라 왕국"이며 60년대 아날로그 녹음에 있어 컬쇼로 대표되는 탁월한 스탭진을 바탕으로 명반들을 여럿 내놓았다는 점, Philips가 지닌 기술적이고 매체선도적인 이미지, DG가 가진 게르만계 레퍼토리에 있어서의 다양성과 전통성 등은 감상자들 대다수가 아무 거부감없이 인정하는 각자의 개성일 것이다.

- 현재의 오리지널스는 그러한 개성들을 몰개성화시킨다. 디자인의 획일화(왼쪽 상단에 박힌 로고와 비스듬하게 배치한 LP 초반 커버)와 리마스터링 방식의 획일화(OIBP)는, 과거 그 음반들이 어느 레이블에 속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예술적 또는 기술적 목표와 가치를 추구했는지를 망각케 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멸망해가는 문명들의 공통점은 획일화"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상황은 클래식 음반계라는 하나의 문화 매체 장르가 사멸해가는 과정을 확인시키는 양태로 다가온다.

-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겠다. 내게 있어서 최악의 악몽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이 세상 모든 메이저 레이블 클래식 음반들이 오리지널스와 GROC로 통합되는 것이다. 진짜로 그런 날이 온다면, 클래식 음반을 사고 듣는 일을 관두는 수 밖에. 그런데 요즘 음반 시장 돌아가는 모습을 보자니 왠지 악몽이 실현되는 순간이 그다지 멀지 않은 것 같아 두렵기 그지 없다.

ps: LP 수집하시는 분들은 제가 이 글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더 잘 알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글루스 가든 - 클래식 음악 듣기
by 영어덜트 | 2009/11/15 10:18 | Diary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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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漁夫 at 2009/11/15 13:32
"멸망해가는 문명들의 공통점은 획일화"에서는 '멸망해 가기 때문에 획일화'지,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스테레오 LP가 처음 나왔을 때는 LP 한 장 값이 노동자 주급과 맞먹었다는 얘기가. 지금은 안습이죠.
Commented by 한우 at 2009/11/15 13:36
그 엘피가격땜시, DG에서는 회사안에서 간부들끼리 한바탕 싸웠다는 소리가..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09/11/15 18:47
확실히 매체 가격의 급하락은 디지털화가 가져온 선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이전에는 없던 여러 문제도 생겼습니다만......
Commented by 한우 at 2009/11/15 13:34
사실 통합보다는 따라했다는 소리가 맞지 않나요?
실제로 OIBP를 처리하는 것은 DG쪽이고, 필립스나, 데카는 옛날처럼 24비트 리마스티링으로 알고 있는데요, 게다가 그 동네는 디지털 녹음을 재발매하는 경우에는 그냥 리마스티링도 하지 않고 발매합니다..
게다가 통합이라면, 오리지널 마스터즈 발매가 더 적합한 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각 회사색은 예전, 유니버설에 통합한 이후부터는 없어졌다고 봐야되지 않을까요?
그 통합시기쯤, 데카의 유명한 사운드 기술경우, 그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을(엔지니어들이지요) 거의 해고하는 바람에 기술이 다 낙소스쪽으로 넘어갔고, 필립스는 그냥 간판만 내걸고 있지요. DG는 그냥 겨우 먹고 살고 있고..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09/11/15 18:52
데카와 필립스 오리지널스의 경우에 OIBP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었습니다...... 리마스터링 방식 등에 대해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가 있었다면 글의 논지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결과적으로는 미숙한 주장이 되고 말아서 아쉽네요.

각 회사별 개성이 퇴색된 것은 유니버셜로의 통합이 이루어진 때보다 음원의 디지털화가 이루어진 때부터라고 보는게 좀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필립스의 현 상태에 대해서는 저도 할말이 없습니다. 브렌델의 커리어 최후반기 녹음들도 발매가 될지 안 될지 불명확하다고 하고...... 그보다 새로 필립스 레이블에서 녹음되는 음반 자체가 없군요.
Commented by gurnemanz at 2009/11/16 00:28
정환씨, 곽태웅입니다.

고클에다가도 덧글을 하나 달았고(유감스럽게도 글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이어서 썩 긍정적인 답은 아니었습니다.) 뜬금없이 블로그에까지 나타나서 쓴소리를 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물어보고 싶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초기 발매의 CD부터(LP는 바라지도 않겠습니다) 충분히 음반을 섭렵했다고 생각합니까?"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09/11/16 11:17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찾아와주셨는데 하필이면 미숙한 글의 뒷정리를 위해 답글을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질문하신 것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글에도 밝힌 바와 같이 고작 5년 정도 사서 들은 정도로는 LP는 능력 밖이고 CD도 아무래도 초기 CD 보다는 재발매 이후의 CD 들에 편향된 수준에 그치는 정도입니다.(초기 CD가 아주 없냐면은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다양다종의 매체를 '충분히' 섭렵하였는가, 라는 비판에는 부적당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충분히'라는 건 어느 정도를 가리키는 건지요? 그리고 얼마나 매체를 다양하게 많이 접해보았는가가 제 글에 있어서 중요한 선결 문제가 되는지도 의문입니다. 메이저 레이블의 카탈로그 구조가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점점 몰개성화된다는 것을 우려하는 것과 "초기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CD와 음반"를 섭렵하였는가의 여부 사이에는 그닥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잘 알지 못하는 기술적인 얘기를 글에 첨가시킨 것은 명백한 실수입니다. 만약 비판하신 바가 그러한 글쓰기에 있어서의 경솔함을 지적하는 데에 의도가 있으시다면 100% 수긍하며 깨끗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밖에 혹시 제가 뭔가 아직 깨닫지 못한 바가 있다면 '사정없이' 답글로 닦아세워 주십시오. 저는 아직 배우는 입장이니까요!^^

ps: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는데 아무쪼록 건강 조심하십시오.
Commented at 2010/01/16 02:1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10/01/16 14:48
안녕하세요. 저도 지금은 다음달 말에 시험이 있어서 빡빡합니다..ㅠㅠ 일단은 그 시험 결과를 본 후에야 올 한해의 나아갈 방향이 잡힐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는 개인적인 시간을 마음 편히 낼 수 없을 것 같네요.

그리고 졸업 축하드립니다. 한창 추운 날씨인데 건강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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