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성>현대성: 바르톡 현악 사중주 전집 -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 1983~1986(EMI)
- 음악사적으로 바르톡의 현악 사중주들은 매우 미묘한 분기점에 위치한다. 한편으로는 조국 헝가리의 국민 음악에 큰 관심을 가지고 동료 코다이와 함께 "진짜 헝가리 민요"를 수집하기 위해 돌아다녔던 작곡가의 젊은 시절 모습이 깊이 반영된, 19세기의 낭만주의의 끝자락에 들어갈 수 있는 "낭만적" 요소가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20세기의 초두에 혜성처럼 떠오른 신진 작곡가다운 파격적 형식과 도전적인 화성법이라는 "현대적"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 낭만성과 현대성의 혼재가 빚어내는 기괴하면서도 야릇한 조화의 풍광이 바르톡 현악사중주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 총 6곡인 바르톡 현악 사중주는 CD 2장 안에 빠듯이 수록가능하다. 이런 경우 요즘같은 고물가 고환율 시대에는 2 For 1의 형태로 염가 전집물을 우선 찾게 되는데, 여러 전집들 중에 뭐가 제일 괜찮은지 알 수가 없어 고클래식 게시판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최고의 "가격 대 성능비"를 보여준다고 추천해주신 것이 바로 이 전집. 예전에 베토벤 현악 사중주 전집을 포스팅했을 때 썼던 것처럼, 무난하고 보편적이며 최소한 본전 생각은 안 나게 만드는 충실한 기본기가 역시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강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 현대음악 특유의 난해함과 생경함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음반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바르톡 현악 사중주의 현대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점을 특별히 부각시키지도 않는다.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은 바르톡의 현대성을 점잖게, 약간 거리를 둔 상태로 관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듯 하다. 반면 19세기적 낭만성의 마지막 자취에는 아낌없이 자신들의 연주력을 투자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느린 템포, 비교적 부드러운 현의 음색, 깎아지르기보다는 완만하게 굴곡을 잡듯이 여유를 두고 조성해내는 낭만적인 분위기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에 친숙한 대부분의 감상자들에게 바르톡이라는 신세계를 낯설음과 부담감을 상당부분 떨쳐내고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 바르톡 현악사중주 치고는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연주이지만, 바르톡의 현악사중주를 낭만주의의 마지막 편린이라기보다는 현대음악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인지하고픈 나에게 이 음반은 완전한 충족감을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물론 바르톡 현악사중주에 대한 1980년대까지의 '전통적'인 접근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은 나름 수확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음반은 그러한 방식의 마지막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이 이 전집을 완성한지 3년 후, 바르톡 현악 사중주 연주의 패러다임은 어느 음반의 혜성같은 등장과 함께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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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어덜트 | 2009/06/18 14:12 | 클래식 음반 리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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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漁夫 at 2009/06/18 21:38
리뷰 땜에 3장 top이던 시절에 산 것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ㅠ.ㅠ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09/06/29 16:39
얼마 전에 용산 신나라에 갔다가 말씀하신 그 3장 top 짜리 음반을 보았습니다. 가격표가 정말 무시무시했습니다. 하지만 EMI 초창기 CD 생산품들 답게 커버 디자인이 요즘에 비해 많이 감각이 떨어지더군요. 1번부터 6번까지가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다는 점은 괜찮았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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