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트리스탄과 이졸데"라고 하면 한국 내에선 아무래도 뵘 할아버지의 음반이 독보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전 세대의 감상자들에게 있어 "명반"이라고 불렸던 건 역시 푸르트벵글러의 이 음반 쪽일 것이다.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보면 최초로 스튜디오에서 정식 녹음된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기도 하고, 푸르트벵글러와 플락스타를 위시한 참가 아티스트들의 면면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 뵘 할아버지의 "트리스탄"이 그분의 "반지" 실황과 같은 맥락에서, 무시무시한 응집력과 추진력 등등 "힘"이라는 한 단어에 수렴될만한 그런 분위기로 가득차 있다면, 푸 선생님의 "트리스탄"은 그보다 훨씬 부드럽고 유장하며 낭만적이다. 과거에 이걸 "뭉개뭉개 피어오른다"라고 묘사하는 비평을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들어보니 그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뵘 할아버지의 음반에 무엇이 부족했는지도. 그건 바로 자욱하게 깔리는 "밤안개"의 느낌, 작품의 대본에서 몇번이고 등장하는 "밤"의 이미지이다. 푸 선생님의 이 녹음에는 그것이 듬뿍 함유되어 있다. - 타이틀 롤을 맡은 주트하우스와 플락스타는 녹음 당시인 50년대 기준으로 봐도 확실히 '지는 별'이라고 할만한 가수들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무대에서 그렇다는 거지, 스튜디오 녹음에서는 꼭 황혼기라고 해서 음악적 혹은 예술적으로 나쁘다고 말할 순 없다. 사실 뵘 할아버지 음반에 출연한 빈트가센과 닐손을 푸 선생님의 이 "밤안개 자욱한" 음반에 가져다놓으면 뭔가 안 맞을 것 같다. 주트하우스와 플락스타는 사람을 탄복하게 만들기보다는 깊이 침잠케 해주는 스타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 단연 눈에 들어오는 조역이 있으니 그건 바로 쿠르베날. 그리고 그 쿠르베날을 맡은 가수는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는 것처럼 젊은 시절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막 스타덤에 올라설락말락했던 이 시기에서부터 세기의 명 바리톤은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내보이고 있다. 피셔-디스카우는 속된 말로 "쿨 가이"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돌쇠틱한", 지적이면서도 헌신적인 쿠르베날을 보여주고 있는데, 정말 너무나 매력적이다. 어쩔 때는 타이틀 롤인 주트하우스의 트리스탄을 압도하고 더 눈에 들어올 정도로. - 이 음반에 대해 혹평을 가하는 글도 심심찮게 보게 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엉망인 음반이고 연주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요즘 기준으로 봐서 우유부단하거나 매너리즘인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들도, 조금만 관점을 바꾸면 50년 아니 그 이전 세대가 이룩한 찬란한 음악적 업적으로 비춰지게 된다. 확실히 요즘엔 이런 스타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연주하지는 못할 것 같다. "밤안개 자욱하게" 의 느낌도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려고 하겠지. 그런 점에서 푸르트벵글러의 이 음반은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소위 "좋았던 옛날"을 재인식하게끔 만드는 매개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음반 얘기에 꼭 빠지지 않고 튀어나오는 "플락스타의 고음부를 슈바르츠코프가 대신 불러줬다" 에피소드. 실제로 들어보면 진짜 거짓을 전혀 섞지 않고 말하건대 "전혀 그런 일 없는 것처럼" 들린다. 혹시나 그런 이유로 이 음반을 폄하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얼마 되지도 않는 고음부는 솔직히 소프라노라면 누가 부르나 다 똑같이 들리고, 우리가 플락스타에게서 기대해야 할 것은 "하이 C가 나오냐 안 나오냐" 같은 파바로티 식의 진기명기 열전이 아니라, 1930~40년대를 빛낸 위대한 "이졸데"가 보여주는 경륜과 노련미, 깊은 표현력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점들에 있어서, 플락스타는 적어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진 않았다. 강철의 여신같은 닐손의 "이졸데"와는 다른, 또 다른 의미에서 탁월한 "이졸데"니까. 이글루스 가든 - 클래식 음악 듣기
|
이글루 파인더
카테고리
최근 등록된 덧글
안녕하세요? 우연히 영..
by 팔다 at 12/21 마젤은 현재 발렌시아에서.. by 영어덜트 at 12/20 제가 오르간을 주장하는.. by 영어덜트 at 12/20 마젤은 국제적으로 과소.. by 한우 at 12/20 초창기 오르간 연주를 .. by 한우 at 12/20 마젤은 좀 지나칠 정도로.. by 영어덜트 at 12/20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by 영어덜트 at 12/20 제 옛 포스팅 중 마젤의 D.. by 漁夫 at 12/19 최근 등록된 트랙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