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안개 자욱하게 깔리다: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etc. 1953(EMI)
- 이 음반 왜 이리 구하기가 어려워졌지? 분명 2~3년 전까지만 해도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불문하고 사방에 굴러다니던 음반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 GROC 시리즈 버젼도 그렇고, 이후 EMI가 내놓은 염가반도 그렇고, Naxos에서 나온 복각판도 그렇고, 죄다 품절 일색이다. 물론 브릴리언트에서 바로 몇 개월 전에 새로이 런칭한 염가 오페라 복각판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으나, 결정적으로 그건 art 리마스터링 이전의 음원이라고 한다. 결국 찾아헤매다 신x라 온라인 쇼핑몰에서 겨우 구매함.

- "트리스탄과 이졸데"라고 하면 한국 내에선 아무래도 뵘 할아버지의 음반이 독보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전 세대의 감상자들에게 있어 "명반"이라고 불렸던 건 역시 푸르트벵글러의 이 음반 쪽일 것이다.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보면 최초로 스튜디오에서 정식 녹음된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기도 하고, 푸르트벵글러와 플락스타를 위시한 참가 아티스트들의 면면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 뵘 할아버지의 "트리스탄"이 그분의 "반지" 실황과 같은 맥락에서, 무시무시한 응집력과 추진력 등등 "힘"이라는 한 단어에 수렴될만한 그런 분위기로 가득차 있다면, 푸 선생님의 "트리스탄"은 그보다 훨씬 부드럽고 유장하며 낭만적이다. 과거에 이걸 "뭉개뭉개 피어오른다"라고 묘사하는 비평을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들어보니 그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뵘 할아버지의 음반에 무엇이 부족했는지도. 그건 바로 자욱하게 깔리는 "밤안개"의 느낌, 작품의 대본에서 몇번이고 등장하는 "밤"의 이미지이다. 푸 선생님의 이 녹음에는 그것이 듬뿍 함유되어 있다.

- 타이틀 롤을 맡은 주트하우스와 플락스타는 녹음 당시인 50년대 기준으로 봐도 확실히 '지는 별'이라고 할만한 가수들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무대에서 그렇다는 거지, 스튜디오 녹음에서는 꼭 황혼기라고 해서 음악적 혹은 예술적으로 나쁘다고 말할 순 없다. 사실 뵘 할아버지 음반에 출연한 빈트가센과 닐손을 푸 선생님의 이 "밤안개 자욱한" 음반에 가져다놓으면 뭔가 안 맞을 것 같다. 주트하우스와 플락스타는 사람을 탄복하게 만들기보다는 깊이 침잠케 해주는 스타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 단연 눈에 들어오는 조역이 있으니 그건 바로 쿠르베날. 그리고 그 쿠르베날을 맡은 가수는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는 것처럼 젊은 시절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막 스타덤에 올라설락말락했던 이 시기에서부터 세기의 명 바리톤은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내보이고 있다. 피셔-디스카우는 속된 말로 "쿨 가이"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돌쇠틱한", 지적이면서도 헌신적인 쿠르베날을 보여주고 있는데, 정말 너무나 매력적이다. 어쩔 때는 타이틀 롤인 주트하우스의 트리스탄을 압도하고 더 눈에 들어올 정도로.

- 이 음반에 대해 혹평을 가하는 글도 심심찮게 보게 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엉망인 음반이고 연주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요즘 기준으로 봐서 우유부단하거나 매너리즘인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들도, 조금만 관점을 바꾸면 50년 아니 그 이전 세대가 이룩한 찬란한 음악적 업적으로 비춰지게 된다. 확실히 요즘엔 이런 스타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연주하지는 못할 것 같다. "밤안개 자욱하게" 의 느낌도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려고 하겠지. 그런 점에서 푸르트벵글러의 이 음반은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소위 "좋았던 옛날"을 재인식하게끔 만드는 매개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음반 얘기에 꼭 빠지지 않고 튀어나오는 "플락스타의 고음부를 슈바르츠코프가 대신 불러줬다" 에피소드. 실제로 들어보면 진짜 거짓을 전혀 섞지 않고 말하건대 "전혀 그런 일 없는 것처럼" 들린다. 혹시나 그런 이유로 이 음반을 폄하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얼마 되지도 않는 고음부는 솔직히 소프라노라면 누가 부르나 다 똑같이 들리고, 우리가 플락스타에게서 기대해야 할 것은 "하이 C가 나오냐 안 나오냐" 같은 파바로티 식의 진기명기 열전이 아니라, 1930~40년대를 빛낸 위대한 "이졸데"가 보여주는 경륜과 노련미, 깊은 표현력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점들에 있어서, 플락스타는 적어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진 않았다. 강철의 여신같은 닐손의 "이졸데"와는 다른, 또 다른 의미에서 탁월한 "이졸데"니까.
이글루스 가든 - 클래식 음악 듣기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by 영어덜트 | 2009/06/08 19:12 | 클래식 음반 리뷰 | 트랙백 | 덧글(3)
트랙백 주소 : http://youngadult.egloos.com/tb/151572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漁夫 at 2009/08/23 11:40
전 EMI에서 제일 처음 CD 발매했을 때의 구닥다리 버전이죠.. 아마 브릴리언트에 들어갔을 리마스터링입니다 ^^;;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09/08/23 13:08
어젯 밤에도 1막까지 듣다 잤는데, 참 대단한 음반이었습니다. 지휘자의 해석이나 악단의 연주, 가수들의 가창 모든 면에서요.

푸르트벵글러의 바그너에 치를 떠는 사람이 한분 기억이 나는데 왜 그러는지 정말 이해를 못하겠더군요.....
Commented by 漁夫 at 2009/08/23 19:52
당시 필하모니아의 기량은 누구 말마따나 진짜 '세계 최고'였으며, 푸르트뱅글러 자신도 월터 레그에게 '이런 오케스트라 놓고 왜 딴 데서 녹음하십니까?'라 말한 적이 있댑니다.

푸르트뱅글러 인기가 다시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전인 1950년대 말~60년대만 해도 푸르트뱅글러의 바이로이트 9번과 트리스탄은 항상 해당 곡의 잣대였다고들 합니다. 제 말이 아니라 다른 나이 드신 평론가들 말씀이죠.

제가 아주 친하게 지내는 한 분께서는 토스카니니를 '안 빤 걸레', 푸르트뱅글러를 '빨아도 역시 걸레'라고 농담하십니다. 그 분은 푸르트뱅글러의 유명 연주를 거의 다 갖고 계시니 반박할 말이 없죠.(ㅎㅎ) 그 분의 선택은 카라얀. ^^;;

:         :

: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