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기본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반듯한 안내자 - 베토벤 현악 사중주 전집: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 1977~1983(EMI)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들은 현악 사중주 장르에서 명실상부한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걸작들이다. 초기, 중기, 후기를 불문하고 각 작품들이 보여주는 잘 짜여진 구조미와 드라마틱한 감정의 표현 등은 그야말로 최후기 고전주의와 초기 낭만주의의 정점이라 할 만 하다. 그러한 높은 가치를 지닌 이들 작품들은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중주단들에 의해 연주되어왔고 또 지금도 연주되고 있다.

물론 녹음도 빈번히 이루어져, 1930년대의 전설적인 부쉬 사중주단으로부터 21세기에 탄생한 신생 사중주단들까지 왠만한 사중주단이라면 한 개 이상의 전집 또는 선집 녹음을 남기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처음 베토벤 현악 사중주의 세계에 입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방대한 녹음 기록들을 앞에 두고 어떤 것을 골라야 할 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솔직히 시판되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을 골라도 상관없지만, 특별히 첫 인상을 사로잡는 음반이 없는 상황에서 깔끔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입문을 원한다면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구 전집을 권하고 싶다.

1971년 빈을 활동무대로 하던 네명의 현악 연주자들이 결성하여, 작곡가 알반 베르크의 미망인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알반 베르크의 이름을 달고 활동을 시작한 이 사중주단은 36년 후인 2007년 해산을 선언할 때까지 현대를 대표하는 특급 사중주단으로 명성을 떨쳤다. 넓고도 깊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들의 레퍼토리 중 단연 핵심은 베토벤과 슈베르트 등 빈 악파 작곡가들의 사중주들인데, 특히 베토벤 현악 사중주의 경우 스튜디오와 실황으로 각각 두 번의 전집 녹음을 남겼다. 기교적인 측면에서의 완벽함과 그로부터 조성해나가는 정교한 구조미에서 느껴지는 견실한 기본기, 그리고 매끄러우면서도 거침없는 역동성이 이 녹음들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고성능 신형 세단 자동차를 타고 있는 것 같은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연주는 그 어떤 유별난 취향을 지닌 감상자라고 해도 일단은 고개를 끄떡이게 만드는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양날의 검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보편적이라는 점은 동시에 왠만큼 베토벤 현악 사중주의 세계에 익숙해진 이들의 입장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진부하고 특징없는 연주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쉬나 바릴리 같은 과거 시대의 자취들이나 타카치 등의 최신 연주 단체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관점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은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연주를 세간의 그것만큼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색창연한 옛날과 약동하는 현재의 중간 지점에서, 어떤 시대 어떤 세상에도 통할 수 있을 만큼 베토벤 현악 사중주의 기본과 원칙을 충실히 구현해내는 점으로 본다면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연주는 확실히 가치가 있다.

특히 새로이 베토벤 현악 사중주를 접하는 입문자들에게 있어서, 충실한 기본기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장점이지 단점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영광이나 최신의 패기는 듣는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는 있으나, 안내자로서 원칙과 기본을 반듯하게 보여주는 역할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입문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전자보다는 후자이다. 강렬한 인상이라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편향되거나 왜곡된 시선을 만들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베토벤 현악 사중주의 입문자들에게, 달리 첫 인상을 확 사로잡는 특별한 음반이 없다면 알반 베르크의 전집으로 시작해보라고 권하는 것이 딱히 잘못된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런데 왜 굳이 '구'전집을 권하냐고? 물론 모두 실황 녹음으로 구성된 신 전집은 앞서 열심히 떠든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장점들에 원숙미와 깊이있는 해석을 부가시켜 한층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기는 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그것을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은 DVD 영상물 뿐이다. 중고장터를 뒤지다 보면 언젠가는 예전에 발매되었던 두 세트짜리 신 전집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베토벤 후기 현악 사중주와 초기 현악 사중주들만 따로 GROC 및 GAOC로 별도 발매되어 있기도 하나, 전자는 기약이 없고 후자는 전집을 구비할 수 없다는 각각의 단점을 안고 있다. 가격 대 성능비의 측면으로 봐도 염가 박스물로 시판되고 있는 구 전집은 값비싼 신 전집보다 낫고, 입문용이라면 후기 현악 사중주들에서 '깊은 감정의 표현'이 약하다는 구 전집의 단점은 별 문제가 안 된다.

세월이 가면 더 매력적이고 개성이 강한 다른 음반들에 밀려서 음반 진열장 한 구석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을 공산이 크지만, 왜곡이나 변형이 없이 베토벤 현악 사중주의 원칙과 기본을 충실하고 반듯하게 보여주는 안내자로서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구 전집은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보다 더 기본기를 충실히 전달하는 안내자가 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현재의 클래식 음악계가 나아가고 있는 현황을 보건데 당분간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지 싶다. 새로 베토벤 현악 사중주에 입문하는 분들은 물론, 그리고 다른 사중주단의 음반들을 듣기에 바빠서 아직까지 안 들어보신 분들도, 모두 이 음반을 꼭 한번 들어보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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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어덜트 | 2009/02/28 12:05 | 클래식 음반 리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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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漁夫 at 2009/02/28 12:15
저한테는 좀 답답하지... 말입니다. ^^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09/02/28 12:34
분명히 그런 맛도 있지만...... 이 음반으로 처음 시작한 제 입장에서는 그것도 괜찮게 느껴지더군요. 기준이 답답하게 들릴만큼 기본에 충실한 이 음반으로 맞춰져서 다른 연주단체들의 음반을 들었을 때 그들이 지니는 제각각의 개성이 한결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고요.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팡야러브 at 2009/03/28 22:19
제가 저것을 사려고 한국 사이트를 뒤졌는데 안팔더군요
일본 아마존과 HMV에서 파는데 HMV에서 3500엔대에 파는데 환율만 진정된다면 바로 해외배송시킬 품목입니다 ^^
현재는 전곡 MP3파일로 만족하고 있지만요.. ㅋㅋ
Commented by 영어덜트 at 2009/04/21 22:37
EMI 염가 박스반들이 어쩐지 최근 재출반이 안되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한국 수입사 사정들을 생각하면 재수입도 왠지 힘든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환율 크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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