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 안인희 : 바그너가 없었다면 히틀러도 없었을까?
어쨌든 그들의 생애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두 사람 다 출신을 명확히 밝히지 않거나 밝히지 못했으며, 둘 다 병적으로 유대인을 증오했다. 그들은 모두 고도로 섬세한 심리적 감각을 보이는데, 그것은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진부한 속성을 포함한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통속적이고 저급한 천민적 요소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으며, 똑같이 소시민들과 가까웠다. 가장 중요한 유사성은 거의 바닥에서부터 최고 수준까지 상승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최고 정점에 도달한 뒤로 그들의 길은 갈라지지만, 바그너의 명성이 히틀러에 의해 가려졌기 때문에 이 점에서도 어느 정도 유사성을 보인다.1)
-안인희,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中

예전에 이모님께서 제 방에 잠시 머물다 가셨을 때, 그분께서는 제가 소장하고 있는 바그너의 오페라 CD들을 유심히 보시다가 갑자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그너가 나치였다며?"


물론 이모님의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히틀러와 나치는 20세기 초반의 독일에서 등장했으니, 당연히 19세기 말에 죽은 바그너가 나치일 리는 없지요. 그러나 "바그너"라는 주제에 대하여 큰 시각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인식을 단지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히틀러와 나치가 바그너와 그의 작품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그것들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활용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그런 "엄연한 역사적 사실들"에 관해서,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가를 규명해보고자 하는 것이,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라는 책의 주제입니다. 저자는 단순히 바그너와 히틀러라는 두 요소 간의 상호 작용 내지는 상호 영향에만 집중하지 않고, 좀 더 거시적으로 보아 머나먼 고대의 게르만 신화가 지니는 특유의 '몰락지향적인 성격'에서부터 주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게르만 신화는 다른 문화권들의 신화들과는 다르게 파괴와 죽음, 즉 몰락을 동경하는 듯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성질이 18~19세기 독일 지방에서 일어난 낭만주의-민족주의 사조로 인해 재발견되면서 당시의 독일 문화권 전체에 허무주의적인 분위기가 감돌게 됩니다.
바그너는 여기에 편승해 특유의 음악적, 연극적 재능을 발휘한 여러 작품들을 통해 "몰락을 지향하는" 풍조를 더욱 체계적이고 확고한 형태로 바꾸어 놓는 역할을 했습니다. 20세기에 이러한 바그너의 예술 세계에 너무 깊이 몰입해버린 히틀러라는 한 남자가 등장하여,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바그너의 예술 기법들을 활용함으로서 마침내 "게르만 신화의 현실화"를 이루어내었다, 라는 거지요.

이상과 같은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상당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그너=나치 라는 형태의 극단적인 바그너 혐오론은 바그너의 음악적 위업마저도 악행으로 치부하는 지나친 논리 전개라는 점 때문에, 바그너의 작품들을 히틀러가 제멋대로 악용했다는 바그너-히틀러 무관론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는 태도 때문에 각각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 책이 취하는 태도는, 말하자면 중도론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게르만 신화 - 바그너 - 히틀러 라는 연결 고리가 저자의 생각처럼 적절한 근거가 있고 튼튼한 논리적 필연성이 갖추어진 것은 아니라는 게 이 책의 주장 속에 존재하는 약점입니다. 이 책이 말하는 바가 전적으로 옳다고 전제를 했을 때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바그너란 존재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세계사에 등장하지 못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없다"라는 얘기가 아니라, 20세기 초반의 독일이라는 시공간은 히틀러라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요인들 모두가,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파시스트 정당의 광기어린 지도자가 등장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등장과 집권은 이러한 요인들 모두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바그너와 히틀러라는 두 존재의 연관 관계에 대한 해석이 중심이 되는 이 책의 주장을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냥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라는 정도의 참고적인 의견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지요.

ps: 만약 히틀러가 정치가가 아니라 바이로이트 축제의 연출가로서의 길을 걸었다면 어땠을까요? 히틀러가 연출한 바그너의 작품들이라......

주1) 안인희,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주)민음사, 2003, pp.307~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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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어덜트 | 2008/11/24 20:06 | 클래식 관련 서적 리뷰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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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안인희 ―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
안인희 ―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 2003년 민음사 〈올해의 논픽션상〉 수상작 역사와 문화 부문 ▶ 글쓴이 안인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문학을 공부했고, 1986~1987년에 독일 밤베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90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 표지의 저자 소개 중에서. ▶ 목차 I. 게르만 신화와 영웅전설 1. 보물 이야기 2. 기사 이야기 3. 사랑 이야......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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