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지크프리트": "지크프리트" 1992년 바이로이트 (유사)실황 DVD -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 2006(Warner)
바렌보임의 바이로이트 실황 "반지" DVD, 그 세번째 발매작인 이 "지크프리트"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보면 되는 겁니다! 이전에 발매된 동 프로덕션의 "라인의 황금"이나 "발퀴레"에서 느꼈던 일말의 아쉬움 내지는 불만감 같은 것은 느낄 겨를도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바그너 작품을 담은 영상물 중에서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을 찾는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가수들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가창과 표현의 한계에 도전하듯이 노래하고, 바렌보임의 지휘 역시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며, 쿠퍼의 연출은 시각적인 즐거움마저 가득 채워줍니다. 너무 칭찬만 늘어놓고 있는게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제게는 모든 측면에서 고려해볼 때 더없이 만족스러운 영상물입니다. 특히 톰린슨의 보탄과 클라크의 미메는, 지금까지 접했던 모든 "지크프리트" 음반 및 영상물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가창과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톰린슨이 묘사한 보탄은 모든 일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고 나가려고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이율배반적으로 냉소적인 허무주의자로서의 태도를 고수하는 인물입니다. 아직은 세계도 영웅들도 자신의 힘과 의지에 복종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두려움을 모르는 젊은 영웅이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새로운 세계를 열 것이라는 사실을 수긍하며 체념섞인 기쁨을 토로하는 보탄의 모습은 정말로 매력적이었습니다. 한동안 "지크프리트"에서의 지크프리트에 밀려 가장 좋아하는 바그너 타이틀 롤의 자리를 잃었던 보탄입니다만, 이 영상물 덕분에 다시 한번 보탄에 대한 애정도가 급상승하는 것을 느낍니다.

"라인의 황금"에서는 로게 역을 맡았던 클라크의 미메 역시 훌륭하기 그지 없습니다. 제딴에는 나름 영리하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헛똑똑이'에 불과한, 소악마처럼 비뚤어져버린 난쟁이 대장장이의 모습을 뛰어난 솜씨로 잘 묘사해내는 클라크의 가창과 연기는 과거 신 바이로이트 시대의 위대한 미메들과 비교해봐도 꿀릴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클라크는 뵘의 1966/67 바이로이트 실황 "반지"에서 동역을 맡았던 볼파르트와 기본적으로는 유사한 듯 하지만, 그보다 좀 더 희극적인 면에서나 비극적인 면에서나 한발자국 정도 더 나아간 해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밖의 다른 가수들도 각자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난 가창과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그것을 바렌보임의 능숙하고도 치밀한 지휘가 잘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쿠퍼의 무대 연출 역시 2막에서 용이 기대보다는 보잘것없이 표현된 것을 제외하면(하긴, 용이 용답게 느껴지는 "지크프리트"가 현실의 무대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음악과 대본이 의미하는 바를 잘 살려내려고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준수한 것이었습니다. 뵘의 1966년 바이로이트 실황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반은 극과 음악의 유기적이고 완벽한 합일을 추구하는 바그너의 악극 이론이 꿈꾸는 이상에 매우 근접한 성과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영상물 또한 그와 동일한 평을 받아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음악적으로도 연극적으로도 매우 우수한 동시에, 두 분야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잘 결합되어 있으니까요.
by 영어덜트 | 2008/11/24 19:56 | 클래식 영상물 리뷰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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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음.. at 2009/07/05 19:20

제목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1)
바이로이트 축전극장, 2006년 8월 27일. (c) 김원철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크리스티안 틸레만. 확대 사진. (c) 김원철 2006년에 바이로이트에 갔던 얘기를 바빠서(귀찮아서) 미루다 이제야 씁니다. ;; 볼로냐에서 학회가 있어서 겸사겸사 독일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마음이 콩밭에..;;)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드레스덴 젬퍼오퍼 '반지' 시리즈가 일정에 꼭 맞더군요. 사실은 하루 여유가 있었는데......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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