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톡의 현대성을 웅변하다: 바르톡 현악 사중주 전집 - 에머슨 사중주단, 1988(DG)

- 1988년 한 해 사이에 녹음된 이 음반은 바르톡 현악 사중주 연주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하였음을 만천하에 공표하였다. 바르톡이 지닌 현대성을 이전의 그 어떤 연주단체들보다 더욱 명확하고 확실히 웅변하는 에머슨 사중주단의 해석은, 이후 동일 작품들을 연주하려는 모든 사중주단들에게 크던 작던 분명한 영향을 주었다. 이 음반이 1988년의 그라모폰 상과 그 이듬해의 그래미 상을 모두 휩쓴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이전에 얘기한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연주와 나란히 놓고 보면, 에머슨 사중주단의 현대성에 대한 집착과 강조가 뚜렷이 드러난다. 가령 현악 사중주 4번의 5악장을 들어보자. 베토벤의 "대푸가" 이후 가장 격렬하고 거친 선율이 흘러나오는 이 악장을 에머슨 사중주단은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듯이 빠르고 거칠게 '쓸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폭풍은 누구라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금속성의 소음과 광택을 띄고 있다.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동일 악장 연주가 잘 다듬어진 목재라면 이쪽은 초정밀 공장의 컨베이어에 올려진 금속 주괴이다.

- 바르톡 현악 사중주에 있어서 가장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현악 사중주 5번 마지막 악장의 민요 구절 또한 에머슨 사중주단이 바르톡의 '현대성'을 웅변하기 위해 공을 얼마나 들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다. 민요의 선율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어레인지한 라디오 CM송처럼 들려오는 이 부분은, 마치 이전까지 전개되던 악상과 그것을 듣고 있는 청자 모두를 조소하고 비아냥거리는 듯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대놓고 작품 스스로에게 냉소적이고 자아비판적인 페이소스를 부여한 연주를 달리 찾아보기란 힘들 것이다.

- 에머슨 사중주단의 이 음반 이후, 소위 신진 사중주단들에게 있어서 바르톡 현악 사중주는 일종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예전에 그라모폰의 어느 기사에서 누군가가 바르톡 현악 사중주와 젊은 신예 사중주단들의 관계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긴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공부할 적에는 연주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이 괴물같은 곡들을, 요즘 젊은이들은 자다가 깨워도 바로 연주해 보입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 젊은이들이 바르톡 현악 사중주 연주에 있어 모델로 삼은 것은 분명히 에머슨 사중주단의 연주와 해석이었을 것이다.

- 앞으로 또 다른 바르톡 현악 사중주 전집을 구비하게 된다면 아마도 타카치 사중주단의 것이 될 듯 하다. 벨시어 사중주단 쪽도 끌리긴 하지만, 일반적인 평가나 인지도 측면에서 타카치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에머슨 사중주단 이후 또 하나의 각광받는 바르톡 현악 사중주 연주로 인정받는 그 음반은 과연 어떤 인상을 가져다줄 것일지?

ps: 뜬금 없는 레이블 이야기 - 이 음반이 속해 있는 DG의 '그랑프리' 시리즈는 그야말로 사족과도 같은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몇개의 음반들이 중저가로 재발매되었으나 그 후 동일 시리즈로 새로운 발매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다. DG도 EMI처럼 난잡한 시리즈 구성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글루스 가든 - 클래식 음악 듣기

by 영어덜트 | 2009/06/29 16:28 | 클래식 음반 리뷰 | 트랙백 | 덧글(0)

낭만성>현대성: 바르톡 현악 사중주 전집 -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 1983~1986(EMI)

- 음악사적으로 바르톡의 현악 사중주들은 매우 미묘한 분기점에 위치한다. 한편으로는 조국 헝가리의 국민 음악에 큰 관심을 가지고 동료 코다이와 함께 "진짜 헝가리 민요"를 수집하기 위해 돌아다녔던 작곡가의 젊은 시절 모습이 깊이 반영된, 19세기의 낭만주의의 끝자락에 들어갈 수 있는 "낭만적" 요소가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20세기의 초두에 혜성처럼 떠오른 신진 작곡가다운 파격적 형식과 도전적인 화성법이라는 "현대적"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 낭만성과 현대성의 혼재가 빚어내는 기괴하면서도 야릇한 조화의 풍광이 바르톡 현악사중주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 총 6곡인 바르톡 현악 사중주는 CD 2장 안에 빠듯이 수록가능하다. 이런 경우 요즘같은 고물가 고환율 시대에는 2 For 1의 형태로 염가 전집물을 우선 찾게 되는데, 여러 전집들 중에 뭐가 제일 괜찮은지 알 수가 없어 고클래식 게시판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최고의 "가격 대 성능비"를 보여준다고 추천해주신 것이 바로 이 전집. 예전에 베토벤 현악 사중주 전집을 포스팅했을 때 썼던 것처럼, 무난하고 보편적이며 최소한 본전 생각은 안 나게 만드는 충실한 기본기가 역시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강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 현대음악 특유의 난해함과 생경함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음반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바르톡 현악 사중주의 현대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점을 특별히 부각시키지도 않는다.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은 바르톡의 현대성을 점잖게, 약간 거리를 둔 상태로 관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듯 하다. 반면 19세기적 낭만성의 마지막 자취에는 아낌없이 자신들의 연주력을 투자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느린 템포, 비교적 부드러운 현의 음색, 깎아지르기보다는 완만하게 굴곡을 잡듯이 여유를 두고 조성해내는 낭만적인 분위기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에 친숙한 대부분의 감상자들에게 바르톡이라는 신세계를 낯설음과 부담감을 상당부분 떨쳐내고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 바르톡 현악사중주 치고는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연주이지만, 바르톡의 현악사중주를 낭만주의의 마지막 편린이라기보다는 현대음악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인지하고픈 나에게 이 음반은 완전한 충족감을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물론 바르톡 현악사중주에 대한 1980년대까지의 '전통적'인 접근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은 나름 수확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음반은 그러한 방식의 마지막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이 이 전집을 완성한지 3년 후, 바르톡 현악 사중주 연주의 패러다임은 어느 음반의 혜성같은 등장과 함께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이글루스 가든 - 클래식 음악 듣기

by 영어덜트 | 2009/06/18 14:12 | 클래식 음반 리뷰 | 트랙백 | 덧글(2)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