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목마르고 배고팠던 시절 : 베토벤 교향곡 전집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1~1955(EMI)
- 카라얀이 필하모니아를 지휘하여 녹음한 이 50년대의 베토벤 전집에서는 이후의 녹음들을 통해 익숙해진 카라얀 특유의 매너리즘을 찾아볼 수 없다. 무척 빠르면서도 앙상블이 완벽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깔끔하고 개운한 기분이 들게 하는 연주이다. 그러면서도 참신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감각적이면서 위트가 넘치는 4번 4악장 마지막 부분을 들어보라!

- 흔히들 생각하는 "황제"로서의 카라얀과는 거리가 있는 이러한 결과물이 나타나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아무래도 이 전집을 녹음했던 당시 지휘자 본인의 처지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EMI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전쟁 직후의 빈에서 카라얀을 처음으로 만났을 당시를 회고하며, 자신이 선심껏 챙겨간 각기 다른 종류의 술 세 병을 카라얀은 정확히 90일 분량으로 나뉘어 하루에 한잔씩 마시더라고 말했다. 훗날의 황제도 이 때는 예술 활동의 측면과 경제적인 면 양쪽 모두에서 파국 직전의 궁핍함에 시달렸던 것이다.

- 한때는 "기적의 카라얀"이라 불리면서 푸르트벵글러를 불쾌하게 만들었을 정도였던 카라얀은 이후 불운과 잘못된 판단이 거듭되면서 점점 나치로부터 평가절하를 받게 되어 종전 직전에는 거의 기피 대상에 가까운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에는 이전의 경력이 문제시되어 나치 부역자라는 멍에를 안고 활동중지의 처분을 당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이 금지된 지휘자!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선임지휘자를 맡아달라고 레그가 찾아온 것은 카라얀에게 있어서는 목마른 이가 우물에 당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그후 "황제"로 우뚝서는 50년대 중반까지 약 10여년의 세월동안, 카라얀은 필하모니아와 함께 EMI에서 엄청난 양의 녹음을 남기게 된다. 이 당시의 방대한 작업량은 한편으로는 카라얀의 어려운 처지를 악용한 레그의 "노예 계약" 탓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본인 스스로가 음악활동에 목마르고 굶주린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베토벤 교향곡 전곡반은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훗날의 카라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순수히 음악에 집중하여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는 성실하고 재능있는 중견 지휘자의 모습이 여기 있다.

- 개인적으로는 카라얀의 모든 베토벤 교향곡 전곡반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세월이 60년 가까이 흐른 녹음인지라 당연히 모노이고 약간 작게 들리는 경향도 있으며 음질이 썩 깨끗하지는 않다. 그러나 "황제"도 "헝그리 정신"에 불타오르던 시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시대연주의 세례를 받은 오늘날의 연주들 못지 않게 깔끔하고 활기찬 베토벤 교향곡을 들을 수 있기에 이 전곡반의 가치는 크다고 생각한다. 2008년 카라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EMI가 염가로 재발매했지만 현재 국내 온/오프라인 매장에서는 멸종되다시피 했다. 이 글을 보신 분들 중 아직 음반이 없으신 분은 혹시나 보게 되면 즉시 사두시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가격도 3만원 선으로 착하니 부담없이 지르시길 바란다.

이글루스 가든 - 클래식 음악 듣기
by 영어덜트 | 2012/12/03 00:37 | 클래식 음반 리뷰 | 트랙백 | 덧글(6)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